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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3-30 18:58
[친환경에세이] ‘다름’의 미학
 글쓴이 : 친환경 (58.♡.80.182)
조회 : 323  

‘다르다’는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대로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다르다’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틀리다’는 다르다. 보통 ‘맞다’는 것은 옳다, 좋다의 긍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틀리다’는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난다’라고 나온 것처럼 ‘옳지 못하다’, ‘나쁘다’의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이처럼 두 용어는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인들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동일어인 것처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을까? | 에코리더스인증원 임석호 대표 |


아내와 내가 다 큰 딸아이한테 자주 지적받는 게 한 가지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나도 어느 날 지적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생각은 너와 달라’라고 해야 될 때 ‘내 생각은 너와 틀려’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걸 알게 됐다. 무의식중에 ‘다르다’를 ‘틀리다’로 아예 바꿔서 쓰고 있는 것이었다. 틀리기 쉬운 우리말 맞춤법에도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 부부 외에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영어로는 ‘different’와 ‘wrong’이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해온 지인들한테 물어보니 미국 사람들은 이 차이를 혼동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고 한다. 서로 분명히 다른 단어인데 왜 헷갈리냐는 거다. 

한국말의 ‘다르다’와 ‘틀리다’도 분명히 다른 단어이다. 그런데도 이 두 용어의 사용을 혼동하는 것은 ‘다름’을 ‘옳지 못하다’라는 부정적 감정으로 느끼게 만드는 오랜 문화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민족의 오랜 습성에는 ‘동질감’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단일민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경향이 아닐까. 한국인들이 너와 나라는 말 대신 ‘우리’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도 주변의 사람들과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도 우리 남편, 우리 아내고, 집도 우리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양인들이 들으면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로 엉뚱하게 오해하기 십상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 역시 나와 동일한 범주에 있어야 될 사람이 그렇지 못할 때 오는 불편함의 표현일 것이다. 동질감에 익숙하다 보니 우리 민족(여기서도 ‘한국인’이라는 표현보다 ‘우리민족’이라는 표현이 훨씬 정감 있게 느껴지지 않는가?)에게 ‘다르다’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싶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보다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토론 문화가 서양에 비해 자연스럽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름’을 인정하는 게 여전히 많이 서투르지 않나 싶다.

정(情)의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의 엄마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아기를 안고 업고 같은 방에서 생활하며 아이와 동질감을 깊게 한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아기를 독립된 공간으로 분리하는 서구의 문화와는 크게 대조가 되는 부분이다. 이런 연유로 한국인은 서양인에 비해서 엄마에게 느끼는 정이 유별나면서 동시에 의존적인 마음이 강할 수 있다. 의존적인 마음은 분리되기 싫다는 것이고 결국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동질감’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동질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동질감에 익숙해진 우리 민족에게는 당연히 부정적인 느낌을 줄 수밖에 없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을 파악해보면 세상은 ‘다름’이 있어서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아름다움의 핵심은 조화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남 미인의 조건도 ‘눈이 커야 된다, 코가 커야 된다’가 아니라 얼굴 각 부분의 균형과 조화가 맞아야 하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동일한 것들 사이에서는 굳이 조화를 맞출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화란 것은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가능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름다움이란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연인 사이 끌림의 비밀도 ‘다름’에 있다. 동물들은 서로의 체취에 민감하다. 체취를 통해서 자기 짝을 찾곤 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유사한 면이 있다. 유난히 체취가 끌리는 상대가 있다면 그 사람이 자기의 천생배필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 비밀은 유전자 차이의 크기에 있다고 한다. 유전자 차이가 클수록 둘 사이에 태어나는 2세의 건강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유전자 차이가 클수록 2세에게 전달되는 유전자풀이 커지고, 유전자 풀이 클수록 면역력이 좋아져 외부 병원균 등의 침입에 대한 방어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근친 간의 결합을 막아왔을 것이다. 결국 건강도 ‘다름’이 있어서 더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은 ‘다름’에 끌린다. 음은 양에게, 양은 음에게 끌리게 되어있다. ‘다름’은 조화로움의 시작이다. 건강과 아름다움의 근원인 것이다. 나와 ‘다른’ 능력,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사회는 더 건강하고 아름답고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다름’을 부정적 의미의 ‘틀림’과 동일시하는 순간부터 오해와 충돌, 갈등은 필연이 된다. 오히려 ‘다름’ 은 ‘같음’에 비해서 더 ‘건전하고 건강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정의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물론 ‘다름’이 무조건 선이고 옳은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같은 배에 탄 사람들끼리 노 젓는 방향이 다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늘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것도 결코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같은 방향으로 가야 되는 조직 내에서 다른 의견들은 통합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에서 배제될지라도 과정에서 다른 의견들이 다양하게 도출되고 합의될 수 있다면 더 좋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특히나 친환경농업인들에게 ‘다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8월 27일 개정된 친환경농어업법에서는 친환경농어업의 정의에 ‘생물의 다양성 증진’이라는 표현이 새롭게 포함되었다.

 친환경농업의 핵심에는 ‘다양성’이 있는 것이다. 해충을 박멸하고자 살충제를 뿌리는 것이 관행농업이라면 해충을 박멸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항하는 천적도 존재하고, 해충에 대한 저항성도 길러서 좋고, 나쁨이 함께 어우러져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친환경농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윤작’도 같은 것만 존재하게 하지 말고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져서 더 좋은 결과를 이뤄내게 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다름’은 동일한 것들만 모여 있는 것에 비해서 더 건강할 수 있고,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다름’이 포용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같음’이 좋겠지만 ‘다름’도 그 이상 존중해줘야 할 것이다. 나와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다름’의 미학을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갈수록 ‘나의 다름’, 즉 개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다양성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