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
- 박기동 -
이번 생이 다 할 때까지
얼마나 더
내 몸을 비워야 할까?

내 고향은 늘 푸른 동해
그리워 마지못해
내설악 얼음물에도
다시 몸을 담근다.

그리워 마지못해
내설악 칼바람에도
다시 내몸을 늘인다

이번 생을 마칠 때까지
얼마나 더
내 몸을 비워야 할까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한 교수이자 시인인 박기동 씨의 ‘황태’라는 시가 어느 날 가슴에 박혔다.
「내설악 동장군 칼바람에 황태 덕장 신바람 났겠다. 덕장 인부들 바쁜 손길에 칼바람에 무방비로 내걸리는 황태의 쫙 벌어진 입, 입들. 춥다 추워 죽겠다는 비명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고향서 햇살과 눈바람, 원초적 그리움 만나 어우러지는 희열의 입인가 보다. 얼고 녹고 다시 어는 희열로 제 몸 금실오라기같이 풀고 풀어내 중생의 어혈 든 몸과 마음 풀어주는 황태. 그 열락(悅樂)의 입, 입들이여.」 문학평론가 이경철 씨의 평론 역시 경탄스러운 예술의 경지다.

시인과 술꾼의 벗 … 명태

명태가 사라졌다. 요즘 동해에선 명태가 잡히지 않는다. 1981년 16만톤에서 2006년 60톤으로 줄더니, 2008년부터는 아예 통계에서 빠졌다. 국내의 명태는 대부분 오호츠크해와 베링해에서 잡아온 것이고 일부 일본에서 사온 것도 있다고 한다.
국내 수요의 70%를 차지하는 강원도 용대리 황태덕장의 명태도 마찬가지. 원양어선 명태조차 금값인 데다 구하기도 쉽지 않다. 2007년 2,200만 마리를 덕장에 걸었지만 올해는 1,700만 마리에 그쳤다.
도대체 그 많던 명태는 어디로 갔을까. 명태는 찬물에서 사는 생선이다. 전문가들은 바닷물이 따뜻해진 것을 첫 번째 이유로 삼는다. 동해 수온이 30년 사이 0.8℃(세계 평균 0.5℃)나 올랐다는 것. 지구온난화의 위협은 푸른 동해 우리 술안주의 생존까지 싹쓸이해 간 것이다. 오호츠크해 베링해에서 씨가 말랐다는 주장도 있다. 아예 겨울철 산란을 위해 동해로 내려올 명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 명태는 꽁꽁 얼었다 /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 문턱에 꽁꽁 얼어서 /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의 ‘멧새소리’에서>

평안도 사람이었던 백석(1912∼1995) 역시 명태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명태는 요즘 세태에 많이 나도는 명퇴(명예퇴직)와 어감이 비슷해 나 같은 486세대들에겐 쓸쓸한 단어이기도 하다. 그렇다. 유난히 시인들이 좋아했던 명태는 서러운 우리들 자신이기도 하다. 한겨울 덕장에서, 처마 끝에서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는 황태.
꽁꽁 얼어 가슴에 ‘창 고드름’을 수없이 달고 있는 노랑태. 대롱대롱 입 벌리고 걸려 있는 서러운 명태. 칼바람 눈보라에 속살까지 노랗게 멍든 미라. 방망이로 두들기지 않아도 부들부들한 살집. 시인의 언 가슴은 말라 터져 더덕처럼 부풀어졌다.

[…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 이집트의 왕처럼 미라가 됐을 때 /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 (카아!) /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 짜악 짝 찢어지며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 명태, 명태, 라고 이 세상에 남아있으리라]
<양명문 시, 가곡 ‘명태’에서>

하늘이 만들어 준 내설악 덕장의 명태

명태는 왜 명태일까. 함경도 ‘명천’고을의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처음 잡았다 해서 ‘명태’라는 설이 있다. 이 생선을 많이 먹으면 ‘눈이 맑아진다’고 하여 명태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제사상에서 빠지면 큰일 나는 생선이었다. 명태 새끼는 노가리, 냉동하지 않은 싱싱한 것은 생태, 꾸덕꾸덕하게 반쯤 말린 것은 코다리, 완전하게 얼린 것은 동태, 두 달 정도 바짝 말린 것은 북어, 봄에 잡힌 춘태, 산란 후에 잡힌 꺽태, 작은 것은 막물태, 애기태 그리고 강태. 망태, 백태, 왜태, 조태, 진태, 흑태… 내장은 창란젓, 알은 명란젓을 담근다.

황태덕장에서도 여러 이름이 있다. 명태는 덕장에서 ‘사람 손이 수십 번 넘게 가야 황태’가 된다. 서너 달 동안 스무 번 이상 얼렸다 녹였다 해야 한다. 적당하게 춥고, 바람도 알맞게 불어줘야 한다.
결국 황태는 하늘이 만들어 준다. 덕장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무두태, 몸이 부서진 것은 파태, 속이 딱딱한 놈은 골태, 검은 빛을 띤 놈은 흑태… 황태는 속살이 노르스름하고 부드러워야 한다. 기계로 말린 것은 흰빛이 나며 딱딱하다.

이른 아침, 아내가 다듬잇돌에 북어를 올려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방망이질이 매섭다. 그 옆엔 밤새워 술 마시고 들어와 쓰러져 자는 남편. 얼씨구, “드르렁! 드르렁!” 코까지 곤다. “저 웬수!” 아내의 손이 더 빨라진다. 남편은 아는지 모르는지 천하태평이다. 북어는 두들겨 맞으면서 얼부푼다. 살도 결 따라 보풀보풀 보푸라기가 인다.
어젯밤 남편은 북어포를 쭉쭉 찢어 안주로 먹었다. 대학시절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노가리 안주는 사라졌다. 새끼를 잡아대면 명태 씨가 마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는 게 뭐 별건가. 노가리처럼 싸리나무 꼬챙이에 끼워져 있는 우리네 막장인생. 눈 부릅뜬 채 입을 쩍 벌리고 노릇노릇 구워진 노가리 신세. 가도 가도 팍팍한 황톳길. 이젠 명태 눈알이나 구워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울컥 목이 멘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 노래 되고 시가 되고 / 약이 되고 안주 되고 / 내가 되고 니가 되고 / 그댄 너무 아름다워요 / 그댄 너무 부드러워요 / 그댄 너무 맛있어요 / 감사합니데이 / 내장 창란젓, 알은 명란젓, 아 가 리로 만든 아 가 리 젓, 눈알은 굽어서 술안주하고 괴기는 국을 끓여 먹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는… 또 약용으로도 쓰인데제이요… (중략) / 이 밖에도 다른 잡는데 방법에 따라 지방에 따라 뭐뭐 이래 많은지… / 아바이마!! 밥 잡수소. 예!]

강산에가 부르는 ‘명태’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오르는 ‘연어’처럼 고귀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죽어서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처럼 기어코 아낌없이 살아야한다.

▣ 자료참조 : 동아일보 ‘시인과 술꾼의 벗… 명태’, 사진 : 블로거 : 밝은미소(corps593), 으악새(kjm5212), 동네액션(epos0217)